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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보단 능력” 한 단계 앞섰던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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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6-21 21:04 조회3,0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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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보단 능력” 한 단계 앞섰던 조선시대

 

직업·자립생활 정책 위주…점복가 등 별도 직업도

장애예술인협회 발간 ‘한국장애인사’ 속 역사 소개

 

 

 

조선 말기 장애인의 모습을 담은 김준근 '풍속화첩' 중 '병신'.(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 소장) ⓒ역사속장애인은어떻게살았을까에이블포토로 보기 조선 말기 장애인의 모습을 담은 김준근 '풍속화첩' 중 '병신'.(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 소장)  ⓒ 역사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 역사를 빛낸 인물 가운데 장애인이 있지만 역사는 그 인물의 장애를 드러내지 않았고, 열심히 살며 큰 일을 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장애인이 있다. 한국장애예술인협회에서는 이런 역사 속 장애인물을 발굴해 ‘한국장애인사’를 펴냈다. 이중 조선시대 장애 명칭과 유형, 복지정책,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을 소개한다.

■‘독질’로 불렸던 조선시대 장애인=조선시대 장애인은 어떻게 불렸을까? 오늘날 우리는 흔히 ‘장애인’이라 칭하지만, 그것은 1980년대 초반에 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 쓰이기 시작한 것이고, 근대 이후만 해도 ‘불구자’란 용어가 주로 쓰였다,

조선시대의 경우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독질(篤疾)’, ‘폐질(廢疾)’, ‘잔질(殘疾)’ 이라 칭했고, 민간에서는 주로 ‘병신’이라 칭하곤 했다. 이처럼 전통시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장애를 질병으로 인식했고, 장애인을 고질병에 걸린 사람으로 인식했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장애인이 존재했다. 예컨대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지체장애인, 척추장애인, 왜소증장애인, 정신장애인, 기형아, 백색증, 구순구개열, 양성인, 성기능 장애인 등이 있었다.

■직업과 자립생활 권면, 조선시대 복지책=조선시대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복지정책은 상당히 선진적이었다.

우선 그들은 장애인에게도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하도록 권면했다. 예컨대 조선후기의 실학자 최한기는 ‘인정’에서 어떤 장애인이라도 배우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도 ‘담헌서’를 통해 ‘소경은 점치는 데로, 궁형당한 자는 문지키는 데로 돌리며, 심지어 벙어리와 귀머거리, 앉은뱅이까지 모두 일자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무조건 사회적 약자로 여기며 취업에서 배제시키는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양상.

물론 거동이 불편한 중증장애인은 조정이 직접 나서서 구휼했다.

다산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듣지 못하는 사람과 생식기가 불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며 “다리를 저는 사람은 그물을 떠서 살아갈 수 있지만 오직 중환자와 불구자는 구휼해줘야 한다”고 강조한 것.

이밖에도 조정은 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쳤다. 장애인에게는 조세와 부역 및 잡역을 면제하고, 죄를 범하면 형벌을 가하지 않고 면포로 대신 받았으며, 연좌제에도 적용하지 않았다.

또한 시정, 즉 부양자(활동보조인)을 제공하고, 때때로 노인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하사했다.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설치해 위기에 처한 장애인을 구제하기도 했다. 

EBS에서 방송됐던 조선시대 모습.ⓒ화면캡쳐에이블포토로 보기 EBS에서 방송됐던 조선시대 모습.ⓒ화면캡쳐



■점복가, 독경가…그들만의 직업=전통 사회에서 장애인은 집안에서 청소하기, 밥하기, 심부름하기 등 다양한 가사노동에서부터 집밖에서 안경을 제조하는 안경장이, 칼이나 낫 도끼를 만드는 대장장이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갖고 자립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별도로 장애인만의 직업을 두고 있었다. 점복가, 독경가, 악공 등이 바로 그 것.

점복가는 점을 쳐주고 대가를 받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실명해 시각장애인이 되면 주로 점복을 했다. 독경사는 도교나 불교 경전을 읽어 병을 치료하거나 기우제를 지내는 것으로, 주로 시각장애인이 했다.

과학이나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점복이나 독경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그래서 그들 중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악공은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내연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길거리에서 연주하며 구걸했다.

또한 조선 조정은 별도로 장애인만의 관직을 마련해 정기적으로 녹봉과 지위를 올려주며 자립을 독려했다.

먼저 시각장애인 점복가를 위해 관상감 소속의 ‘명과학’이란 관직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왕의 곁에 머물며 정치의 길흉을 판단하거나 왕실의 간택에 참여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을 악공을 위한 장악원 소속의 ‘관현맹인’ 제도도 있었다. 이들은 왕비나 후궁, 공주 등이 주관하는 내연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그밖에도 조선시대 장애인은 능력만 있다면 종9품 미관말직에서 정1품 정승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장애’보다 ‘능력’ 중시했던 조선=조선시대에는 장애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존재하지 않았다. 장애인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거나 비장애인을 완전한 존재로 보는 시선은 전통시대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것.

완전함에 중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차이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장애보다는 능력을 중시해 조화로운 역사를 만들고자 했다.

한편,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는 조선전기 시각장애인 독경사 단체인 ‘명통시’로 추정된다. 그들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이곳에 모여 경문을 외며 축수했다.

‘명통시’가 주로 하는 일은 기우제, 일식과 월식, 질병 치료 같은 국가적 행사에 참여해 독경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쌀이나 베 등의 물건을 보상으로 받았다. 당시 국가의 지원을 받은 엄연한 공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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