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일자리 - 장애인은 노동무능력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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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4-06-15 17:28 조회3,633회 댓글0건본문
지난 수 십 년 간 장애인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에서, 노동현장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차별과 억압 속에 살아왔다.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투쟁을 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장애인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차별과 억압이 사회구조나 차별적 기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운명이나 개인적으로 인내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살아왔다.
이러한 인식의 가장 저변에는 장애인은 노동무능력자라는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 축적과 경쟁이 중심 매커니즘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능력, 다른 표현으로 노동생산성은 한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노동무능력자로 낙인을 받은 개인 혹은 집단은 자본주의 시장경쟁에서 배제되어 노동의 기회에서 차별을 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권리에서 소외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장애인이 노동무능력자라는 것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현실을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현실에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장애인 노동자들이 현장의 중심에서 노동을 한다거나 지적노동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문제는 장애인노동자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장애인노동자가 노동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서 차별 받기 때문에 노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능력은 교육과 지적능력, 작업장 환경, 사회성 등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작용하여 결정된다. 그런데 장애인 중 50%이상이 초등학교 교육조차도 받을 수 없는 현실, 이동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아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 할 수 없는 현실 그리고 장애인노동자의 노동을 가능케 하는 작업편의시설의 부재 등 사회현실과 노동현실들이 장애인노동자들이 노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인 것이며, 설사 노동과정에 편입된다 하더라도 많은 차별과 부당노동행위를 인내해야 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생산성, 효율성 혹은 경쟁논리로 장애인노동자의 노동권, 생활권 등을 접근한다면 문제의 본질은 가려진 채 현실적 외피 즉, 장애를 가진 사람은 노동무능력자라는 이데올로기만이 남게 된다.
노골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기고 있으며 평등하게 일 할 권리를 박탈하고 건강권, 주거권 등 생활 전반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장애인 노동자들은 자본의 지배방식과 상관없이 모든 사회적 권리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차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유연화는 장애인은 곧 노동무능력자라는 이데올로기를 더욱더 선명히 하여 실질적인 노동과정에의 편입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노동시장에서, 노동현장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차별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장애인고용장려금 축소로 인하여 그나마 취업되어 있던 중증장애인들은 일터에서 쫒겨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엄밀히 말하면 한국사회에는 장애인 노동정책은 없다. 장애인 의무고용제도는 관리하고 감시해야 할 국가기관부터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민간기업은 부담금으로 면죄부를 받고 있다. 취업훈련을 받은 장애인노동자의 대부분은 다시 실업자로 전락하고, 그나마 운 좋게 고용된 장애인노동자는 저임금, 장시간노동 그리고 불법해고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휠체어를 탄 어떤 장애인노동자는 요즘 취업을 포기했다. 수십 차례 입사원서를 집어넣었고 이 회사 저 회사를 찾아 다녀보았지만 중증장애인을 고용하려는 기업은 없었다. 몸이 뒤틀리고 휠체어를 타기는 했지만 오직 취업을 하겠다고 외국어와 컴퓨터를 공부하고 학업성적도 우수하지만 그는 여전히 실업자다. 지금 대학 졸업반인 한 뇌성마비 대학생은 나를 보면 매번 같은 질문을 한다. “형! 나 졸업하면 취업할 수 있을까?”
자본과 국가는 끊임없이 그리고 계획적으로 장애인을 사회와 격리시키고 열등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개인의 운명이고 개인이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과연 어디 그런가?
장애(Disablment)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다. 장애는 특수한 조건과 상황에서 발생한다. 만약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아무 불편함이 없이 노동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노동의 현장에서 장애인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노동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는커녕, 끊임없이 억압하고 차별하기 위해 자본과 국가가 만들어 놓은 사회 경제적 구조가 노동의 현장에서 장애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노동자의 대부분은 자신이 노동을 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장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장애인은 노동무능력자라는 이데올로기를 장애인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장애인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활동하는 조직이 있기는 하지만, 인적 물적 토대가 너무나 취약하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조직된 노동자나 다른 집단이 싸워주기는 만무하다.
그러나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소수의 투쟁이었지만 장애인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비타협적인 투쟁이 점점 많은 장애인들을 투쟁에 결합시킬 수 있었고 투쟁의 과정에서 장애가 아니라 사회구조가 원인이고 자본과 국가가 끊임없이 이러한 구조를 만들어내고 유지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장애인 스스로가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회 노동단체가 함께 투쟁에 결합하면서 연대의 중요성도 새삼스럽게 확인 할 수 있었다.
지난 이동권 투쟁의 기억과 어느 해고된 장애인 노동자의 작지만 소중했던 행복을 생각하며, 장애인노동자가 노동시장에서, 노동현장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삶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은 결코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들은 직장 동료들과 회식하던 자리, 급여를 받아 이제 세 돌이 갓 지난 아이의 장난감이나 과자 한 봉지 사가 지고 집에 들어갈 때, 그리고 당당한 사회인으로 세금(무척 아깝지만)을 낼 때 행복을 느꼈습니다. ”
(어느 해고된 장애인노동자의 편지 中에서)
박경석(노들장애인야간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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