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아 아들, 국가대표 수영선수로 키운 유현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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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4-04-24 23:12 조회5,303회 댓글0건본문
"진호 엄마는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행복…이보다 더 뿌듯한 일은 없을 것"
아이와 하루 종일 전쟁을 치른 다음 잠자리에서 눈을 감고 ‘이대로 마지막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김없이 아침이 왔습니다. 간밤에 꾼 악몽은 현실이 돼 나를 기다렸습니다. 땅을 내려다보며 아파트 베란다에 몇 번을 섰던지…. 이제는 지난 일이지만요.”
유현경(43)씨는 자폐아 아들 김진호(18)군의 엄마다. 진호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난 지 15년. 눈물 없이 지낸 날이 없었다. “왜 하필 나에게…”라는 원망과 고통으로 넘쳐나던 그의 눈물샘은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긴, 늠름하게 자란 아들을 바라보는 기쁨으로 채워졌다.
진호는 장애인 국가대표 수영 선수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장애인 선수 랭킹 1위다. 2002년 아시아·태평양 장애인 경기대회에서 진호는 자유형 50m, 100m 등 4종목에 출전해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를 땄다. 진호는 올해 부산체육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수영반 학생들과 똑같이 훈련하고 대회에도 함께 참가한다. 지난 4월 9일 부산에서 유씨를 만났다. 진호는 4월 19일 동아수영대회를 앞두고 학교 수영장에서 한창 훈련 중이었다. 인터뷰 내내 엄마는 흰 수영 모자를 쓰고 물길을 가르는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상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죠. ‘진호 엄마’는 오직 나만 할 수 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사는 것.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두 돌 지나도 ‘엄마’란 말 안해
18년 전 진호를 낳던 날도 행복했다. 산부인과 초음파 검사에서 딸인 줄 알았던 아이가 아들로 태어났다. 진호는 온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진호는 무척 순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진호는 장난감 자동차 바퀴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엎드려서나 누워서 바퀴만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돌렸다. 밖에 나가서는 주차돼 있는 자동차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바퀴를 만지며 무아지경에 빠졌다.
“당시만 해도 자폐증이라는 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진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했죠. 오히려 진호의 행동을 보며 ‘혹시 천재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어요.”
진호는 두 돌이 지나도 ‘엄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엄마 목소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과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는 반응했다. 진호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호는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데굴데굴 구르거나 울부짖었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였다. 세 돌이 지나도 진호는 말 대신 괴성과 몸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일본어 학원 강사였던 유씨는 일을 그만두고 아이에게 매달렸다. 진호가 4살 되던 해 가을 서울대학병원을 찾았다. 발달장애자폐증 판정을 받았다. 병원을 나서 택시를 타려고 순서를 기다리는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처음엔 ‘왜’냐고 울부짖었어요.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난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니. 차라리 장애아 입양은 할 수 있겠더라고요. 주위의 사람들이 미워졌어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던 거예요. 화풀이를 하고 싶었죠.”
유씨는 “자폐아의 엄마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담을 쌓게 된다”고 말했다. 죽음의 유혹이 다가왔다. 11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밖을 내려다보며 자신과 진호의 시신이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자식이 더 빨리 세상을 떠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그 무렵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첫 예배 때 1시간여 동안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유씨는 “신앙의 힘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로소 고통이 현실임을 인정하게 된 거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처음에는 진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만 생각했어요.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요. 하지만 모성애란 본능인가봐요. 지금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게 됐어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느끼게 된 거죠.”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 자르기도
진호의 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4살부터 8살까지 만 4년 동안 진호는 일반 유치원 5곳과 특수 치료 기관 2곳을 전전했다. 효과는 크지 않았다.
8살 때 진호는 유치원의 1m 높이의 난간에서 한 아기를 밀어 넘어뜨려 병원에 실려가게 했다. 사고 현장에 모인 원생 엄마들은 “쟤 이상한 아이 맞지? 위험하다, 정말”이라며 수군거렸다. 진호는 낄낄거리며 놀고 있었다. 유씨는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으로 진호를 데리고 오는 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2월생인 진호는 정상보다 2년 늦은 9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유씨는 담임교사의 양해를 얻어 수업시간 내내 교실 뒤에 앉아 진호를 지켰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42일 만에 휴학을 했다. 수업 중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등 이상한 행동을 계속했기 때문. 아무것도 모르는 진호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유씨의 눈에는 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유씨는 진호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동안 진호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짰다. 특수 교육 시설에 다니면서 관련 서적을 읽어 기초 지식은 쌓여 있었다.
“당시 의사인 남편 월급 180만~200만원 중 150만원은 진호 교육비로 썼어요. 일종의 신앙처럼, 곧 나을 줄 알았죠. 그런데 막상 진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진호에게 내 마음을 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식사예절 등 사회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부터 시작해 언어 능력 향상, 자립 생활력 향상 등 단계별 프로그램을 짰다. 교육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물건 사는 것을 알려주려면 돈의 개념부터 설명해야 했다. 언어 교육을 위해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재를 참고로 했다. 식사 중 방귀를 뀌면 먹던 밥그릇을 빼앗는 등 엄격하게 대했다. 무조건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서 벗어났다.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는 말도 들었지만 유씨의 생각은 달랐다.
“언젠가는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하잖아요. 가엾다고 모든 걸 다 해주면 결국 아이에게 손해예요. 아이를 강하게 키울 수밖에요. 진호를 야단치면서 속으로는 울었어요. 눈물이 솟아나면 진호 몰래 울었어요. 진호도 이런 엄마 마음을 이해했을 거예요.”
유씨는 “진호가 좋아하는 게 아닌, 진호에게 좋은 것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많은 자폐아 엄마들이 홧김에 야단을 쳤다가 보상 심리로 잘해 주곤 하는데 일관성과 원칙은 자폐아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관성 있는 교육이 가장 중요
진호가 10살 되던 해 장애아와 통합교육을 실시하는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측에서 제시한 입학 전제조건은 진호의 편식을 고치는 것이었다. 진호는 당시 컵라면이나 초콜릿 등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밥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유씨는 진호의 편식을 고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유씨는 진호를 데리고 가평 콘도로 갔다. 유씨는 매일 진호를 데리고 인근 산에 올라가 진호에게 김치, 멸치, 밥 등이 담긴 도시락을 줬다. 라면과 과자를 찾는 진호는 밥을 먹지 않았다. 진호는 그렇게 이틀을 굶었다. 진호가 밤에 지쳐 잠든 모습을 보고 유씨는 밖에 나와 눈물을 쏟았다. 그러기를 3일째, 유씨는 진호를 데리고 유명산에 올랐다. 마음이 약해질까봐 진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점심 즈음 진호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마침내 진호는 밥을 비웠다.
“진호에게 편식은 자신을 가두는 가장 큰 벽이었어요. 자폐아는 제각기 높은 벽을 쌓고 있죠. 진호는 벽이 허물어지자 모든 게 달라졌어요. 세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자폐아의 심리는 안개 속에 갇힌 운전자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진호도 그 불안함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던 거예요. 손을 내밀고 있었던 거지요. 손을 내밀자 진호는 꼭 잡았어요.”
중앙기독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진호는 학교에서 사회 적응 훈련을 하는 한편, 한글·산수·컴퓨터 등 기본 교육을 받았다. 유씨는 진호에게 옷 정리, 청소, 설거지, 바느질, 물건 사는 방법 등 생활 교육을 시켰다. 용돈 기입장을 쓰게 하는 기초 훈련도 곁들였다.
유씨는 진호가 5학년 되던 해 교내 수영반에 넣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진호는 수영장에서는 난리법석을 떨지 않았다. 진호는 수영장을 찾을 때마다 평소와 다르게 활기를 보였다. 유씨는 진호가 수영반에 들어간 이후 수영복 갈아입기부터 자기 물건 정리하기까지 필요한 행동을 일일이 가르쳤다. 수영반 활동이 진호 입장에서는 좋은 사회 적응 교육이었던 셈이다.
“늘 불안해하던 진호는 물 속에서만은 자신감이 있었어요.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던 진호는 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깨달았던 거예요. 비장애 학생과 똑같이 훈련을 받으면서 참을성도 키웠죠.”
진호는 수영 특기생으로 수원북중학교에 입학했다. 유씨는 진호의 훈련을 위해서는 일산·평택·안산·진주·부산 어디든 갔다. 하루 왕복 150㎞가 넘는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호는 중학교 입학 후 실력이 부쩍 늘어 1학년 때인 2001년 5월 전국장애인체전 50m와 100m 종목에서 우승을 한 데 이어 2002년 4월에는 일반 학생들도 함께 참가한 경기도지사대회 중등부 자유형 100m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02년 7월 장애인 수영부문 국가대표로 선발돼 부산 아시아·태평양 장애인 경기대회에서 2관왕에 올랐다. 유씨는 “시상대에 오른 진호가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국 수영대회인 동아수영대회에서 일반 선수들을 제치고 자유형 1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수영훈련 위해 하루 150㎞ 운전
실력은 있었지만 자폐아라는 이유로 진호를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이 여의치 않았다. 유씨는 “진호를 키우면서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진호가 아니라 세상의 편견”이라고 말했다. 부산체육고등학교에서 진호를 받아줬다. 유씨는 지난해 11월 남편을 남겨두고 아들을 데리고 수원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진호를 위한 5번째 이사였다. 아버지 김기복씨는 2주에 한 번 부산을 찾는다. 진호는 아빠 보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훈련은 오후 4~5시간씩 받는다. 오전에는 학교의 양해로 직업 재활훈련을 한다. 학교 교과 과정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스포츠센터에서 청소·자판기 관리 등 단순한 일을 하면서 직업훈련을 하는 것. 학교에서 차로 40~50분 떨어진 스포츠센터까지 유씨는 매일 진호를 출퇴근시킨다.
“진호의 인생이 이제 내 인생이죠. 그동안 겪은 아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진호가 준 기쁨은 그 이상이었어요. 지금도 진호의 미래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하지만 날마다 진호에게서 큰 가능성을 발견해요. 근사한 양복 차림의 사회인으로서 진호를 그려보며 웃음 짓는 날이 더 많아요.”
유씨는 최근 진호를 키운 경험을 모아 책 ‘자폐아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들녘)’를 펴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수영장에서 진호를 불러내자 진호는 인사를 하는 듯하더니 물을 끼얹었다. 유씨는 “반가움의 표시”라며 “호랑이 코치 선생님이 출장을 간 데다 사진 촬영을 핑계로 훈련을 잠시 빠지게 돼 기분이 좋은 것 같다”고 웃었다. 진호는 “올림픽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부산=김승범 주간조선 기자(sbkim@chosun.com)
◈유현경씨가 제안하는 집 안 교육 프로그램
병뚜껑 맞추기 : 화장품 병을 모아 짝을 맞춰 뚜껑을 찾게 했다. 손의 미세근육을 쓰도록 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혀 운동 : 초콜릿 시럽을 코·턱·볼 등에 찍어바르고 혀로 핥게 했다. 언어 장애 치료에 혀 운동이 도움이 됐다.
따라 그리기와 따라하기 : 식탁에 마주앉아 그림을 따라 그리게 했다.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 다양한 단어를 따라하는 놀이를 통해 언어 능력을 키워줬다.
고구마·당근 판화 : 요리하다 남은 고구마·감자·당근 등에 조각을 한 다음 물감을 묻혀 찍는 놀이. 허벅지·배 등에 찍어 흥미를 끌었다.
손인형 놀이 : 손인형을 손에 끼고 말을 하자 관심을 보였다. 인형마다 다른 음성을 냈다. 엄마와 대화할 수 있는 통로가 됐다.
낱말카드 만들기 : 시중에서 파는 낱말카드는 실생활과 동떨어진 게 많다. ‘레고’ 등 생활과 밀접한 낱말카드를 진호와 함께 만들었다. 단어 공부와 함께, 카드를 만들면서 손가락 미세근육도 많이 사용하게 했다.
부엌에서 일하기 : ‘마늘 까기’ ‘밤 까기’ 등을 시켰다. 까는 개수만큼 과자를 주자 놀이에 집중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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