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와 텔레비전에 고하는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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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5-06-04 09:13 조회3,657회 댓글0건본문
농아인협회 국회 앞에서 1천500명 집회
텔레비전 장례식…자동차 장례식은 무산
▲청각언어장애인에겐 무용지물인 텔레비전에 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에이블뉴스>
한국농아인협회 소속 청각·언어장애인 약 1천500명이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맞은편 국민은행 앞에서 청각·언어장애인의 인권보장을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오후 3시30분부터 시작된 이날 집회는 밤 9시가 넘도록 계속됐다.
이날 농아인협회는 수화와 자막이 없어 무용지물인 텔레비전에 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1종 운전면허를 딸 수 없어 무용지물인 영업용 자동차에 대한 장례식도 치를 계획이었으나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다음은 이날 집회에서 발표된 자동차와 텔레비전에 고하는 제문 전문이다.
이 땅의 영업용 자동차와 텔레비전에게 고(告)하는 제문
유세차(維歲次) 계유년(癸酉年) 유월 초사흘과 초나흘에 걸쳐 미망인(未亡人)인 한국농아인협회는 몇 마디 문장으로 고하노니, 인간사 살림살이 중에 필요한 물건이 자동차와 텔레비전일진데,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물건이 일반인에게는 소중한 물건이로되 이 물건을 떠나보내는 원통한 마음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아, 원통하고 원통하다, 너를 내 곁에 둔지 십 수년이라. 떠나보내는 마음이 원통하지만 미련을 가졌다고 원통함이 해결될 소냐. 나 이제 손 툭툭 털고 뒤돌아서는 발걸음 잠시 거두고 그동안 쌓인 회한을 적어 장사지내노라.
언젠가 정부에서 자동차세 면세한다기에, 텔레비전 수신료를 면제한다기에 없는 돈 털어, 일가친척에게 바삐 꾸어, 무담보로 은행대출 받아 구입하여 애지중지 하였거늘 나라님이 1종 운전면허 못준다하여 뒷곁에 자동차를 처박아두었구나. 텔레비전은 수화가 없어 자막이 없어 애지중지 닦고 닦아 광내다가 장롱에 처박아버렸구나. 아. 애달프고도 원통하다.
이 나라 장애인정책이 잘못되어 듣지 못한다고 천대받고, 듣지 못한다고 텔레비전 보는 세상사 즐거움 뒤로하고, 듣지 못한다고 영화관 문턱에 가지도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입에 풀칠할 일자리 하나 없고, 듣지 못한다고 공부조차 할 기회를 주지 않고, 듣지 못한다고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듣지 못한다고….
아, 이 억울하고 분통터질 세상 누굴 붙잡고 신세타령하리오. 이 가련한 신세 너를 벗을 삼아 텔레비전 보는 낙으로 세상사 즐거움을 삼으려 했는데, 너를 의지 삼아 운전을 하고 굶주린 가족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 했는데…. 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한 가닥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었구나. 프로그램마다 수화가 나오지 않고, 자막이 나오지 않으니 내 무슨 재주로 입만 뻥끗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세상의 낙을 즐기랴. 수십년 막노동으로 고달픈 몸 운전이나 배워 편히 밥벌이라도 하려 했건만 1종 운전 안 된다고, 청각,언어장애인 운전하면 사고 난다고 엄포를 놓으니 나 어찌 너를 어여삐 하고 가까이 할 수 있으랴! 나 이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너를 장사지내야 하니 이 어찌 원통하고 원통하랴!
아, 슬프고도 애달프다! 나 이제 너를 보내고 무슨 희망으로 세상을 살 것이며, 무슨 수로 굶주린 가족들의 입에 풀칠을 할 것인가. 유월의 타들어가는 태양아래서 너를 보내는 마음 아득하고 아득하다. 문득 막힌 가슴 혼절하여 쓰러질듯하니, 그래도 너를 보내는 마지막 길 한 번 더 만져보고 안아보자. 죄 없는 너를 이렇게 황망히 보내는 심정 그 누가 알 것인가. 너를 보내는 이 죄는 이 나라 정부가 청각,언어장애인을 멸시하고 무시하여 생긴 것이니 황천 가는 길 나에게 원한이랑 품지 말고 고이 눈을 감으라.
그리고 너 이제 폐품공장에 들어가 다시 텔레비전으로, 자동차로 환생하는 날에는 내 눈이 시원하게 수화와 자막이 줄줄 나오게 하고, 1종 면허증 없다고 운전하지 말라는 푸념이랑 하지 말라. 그러면 네 다음 생에 기필코 다시 만나 백년고락 누리기를 천지신명께 맹세하노라.
을사년 유월 초사흘, 나흘
한국농아인협회가 고하노라
▲농아인협회 회원들이 행진을 하다 경찰에 막히자 길바닥에 주저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에이블뉴스>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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